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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단장면 허씨고가(丹場面 許氏古家)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단장면 단장1길 57
문의처
허용
소개
단장면 단장리에 있는 분성(盆城) 허씨(許氏)의 주택으로, 고종 27년(1890)경에 구한말의 학자 금주 허채(錦州 許埰)가 김해에서 이곳으로 이사와서 지은 집이다. 마을 뒤편 대곡산(大谷山)을 배경으로 하고 경주산(競珠山)을 바라보며 앉은 서향집인데, 당초에는 안마당과 바깥마당으로 구분하여 안마당에 면해 정침(正寢), 별당(別堂), 내고(內庫), 중문채를 짓고, 바깥마당에 중사랑(中舍廊), 큰사랑, 창고, 대문 겸 행랑(行廊)채 및 가묘(家廟)를 배치한 저택이었으나 현재는 이중 정침, 중사랑, 창고와 가묘 등 4동만 남아있다. 조선후기의 농촌 상류층 주택으로 정침은 팔작지붕에 정면 6칸, 측면 2칸이다. 중사랑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가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우진각집이다. 창고는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이 집은 금주(錦州)에 이어 그 아들 중와 허석(中窩 許鉐), 손자인 호석 허섭(護石 許涉) 등 근대 유학자를 배출했으나 지금은 타인들이 관리하고 있다.
22
어울암 칠성도(어울암 七星圖)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생가로 703-2
문의처
어울암
소개
어울암은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생가로 703-2에 소재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로서 2019년 8월 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58호로 지정받은 칠성도(가로117cm✕세로110cm)를 대웅전에 모시고 있다. 어울암 칠성도는 화기를 통해 1893년 이라는 조성시기 및 화승이 증언(證彦), 인우(仁雨), 일원(日圓)임을 알 수 있는 19세기 후반경의 불화이다. 치성광여래삼존불 및 칠성여래의 정연한 화면 구성과 개성 있는 성군의 표현에서 탱화를 조성한 화승의 세밀한 필치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23
만어사 석조여래좌상(萬魚寺 石造如來坐像)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삼랑진읍 만어로 776
문의처
만어사
소개
24
다죽리 손씨고가(茶竹里 孫氏古家)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산외면 다원1리길 18
문의처
손기혁
소개
청도면 두곡리 쌍수당(雙修堂) 경내에 있는 남계서원(南溪書院)은 1704년(숙종 30) 고려 중기에 평장사를 지낸 김지대(金之岱)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청도 고을 사림의 중론으로 창건하였다. 이 서원은 고려중기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영헌공 김지대(英憲公 金之岱)의 “충효쌍수(忠孝雙修)의 위업을 숭상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에 사당의 이름을 충효사(忠孝祠)라 하였고 강당을 쌍수당(雙修堂)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영헌공이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종군(從軍)하면서 지은 시에 ”국충신지환 친우자소우 충효가쌍수(國忠臣之患 親憂子所憂 忠孝可雙修)“라고 한데서 따온 이름이다. 그후 남계서원은 고종 5년(1868)에 내려진 서원철페령(書院撤廢令)에 따라 훼철(毁撤)되었으나 그후 자손들이 강당을 보수하며 내려 오다가 순종 1년(1907)에 와서 낡은 강당을 철거하고 새로운 강당을 지었다. 1954년도에 후손들이 다시 대대적으로 출연(出捐)하여 재차 강당을 철거하고 지금과 같이 쌍수당으로 확장 중건하였다. 지금의 강당은 옛 건물을 철거하고 1954년에 중건한 것이다. 창건 당시 사당을 충효사, 강당을 쌍수당이라 했다. 완만한 구릉지에 위치하는 남계서원은 사당인 충효사 우측에 강당이 놓인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형태로 제향 기능을 중시하는 조선후기의 사우형 서원에 속한다. 강당 앞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며 배치되고, 그 앞쪽에 소슬대문이 자리잡고 있다. 강당은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가운데 2칸 마루를 두고 좌우에 각각 온돌방을 두었다. 상부구조는 5량가이며, 정면만 소로를 사용하여 수장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모두 정면 3칸의 작은 건물이다. 충효사는 영헌공 김지대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쌍수당 우측에 위치한다. 1987년에 신축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이익공계 건물로 익공 위에 봉두를 조각했다. 기둥에는 주칠을 했으며 기둥 상부와 창방․도리․보 등에 모로단청을 베풀었다. 충효사는 내삼문인 대보문을 통해 출입한다.
25
남계서원(南溪書院)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청도면 두곡3길 43-16
문의처
청도김씨 종중
소개
청도면 두곡리 쌍수당(雙修堂) 경내에 있는 남계서원(南溪書院)은 1704년(숙종 30) 고려 중기에 평장사를 지낸 김지대(金之岱)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청도 고을 사림의 중론으로 창건하였다. 이 서원은 고려중기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영헌공 김지대(英憲公 金之岱)의 “충효쌍수(忠孝雙修)의 위업을 숭상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에 사당의 이름을 충효사(忠孝祠)라 하였고 강당을 쌍수당(雙修堂)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영헌공이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종군(從軍)하면서 지은 시에 ”국충신지환 친우자소우 충효가쌍수(國忠臣之患 親憂子所憂 忠孝可雙修)“라고 한데서 따온 이름이다. 그후 남계서원은 고종 5년(1868)에 내려진 서원철페령(書院撤廢令)에 따라 훼철(毁撤)되었으나 그후 자손들이 강당을 보수하며 내려 오다가 순종 1년(1907)에 와서 낡은 강당을 철거하고 새로운 강당을 지었다. 1954년도에 후손들이 다시 대대적으로 출연(出捐)하여 재차 강당을 철거하고 지금과 같이 쌍수당으로 확장 중건하였다. 지금의 강당은 옛 건물을 철거하고 1954년에 중건한 것이다. 창건 당시 사당을 충효사, 강당을 쌍수당이라 했다. 완만한 구릉지에 위치하는 남계서원은 사당인 충효사 우측에 강당이 놓인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형태로 제향 기능을 중시하는 조선후기의 사우형 서원에 속한다. 강당 앞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며 배치되고, 그 앞쪽에 소슬대문이 자리잡고 있다. 강당은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가운데 2칸 마루를 두고 좌우에 각각 온돌방을 두었다. 상부구조는 5량가이며, 정면만 소로를 사용하여 수장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모두 정면 3칸의 작은 건물이다. 충효사는 영헌공 김지대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쌍수당 우측에 위치한다. 1987년에 신축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이익공계 건물로 익공 위에 봉두를 조각했다. 기둥에는 주칠을 했으며 기둥 상부와 창방․도리․보 등에 모로단청을 베풀었다. 충효사는 내삼문인 대보문을 통해 출입한다.
26
밀양 교동 밀성손씨 고가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밀양향교3길 7(교동)
문의처
밀양손씨교동파종중
소개
이 건물은 교동마을 동편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는 근대 한옥으로 밀양손씨 교동파종택(校洞派宗宅)이다 이 건물은 대문채, 중사랑채, 안채, 아랫채 등 4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초에는 사랑채가 있었으나 30여년전에 뜯어 없어졌다고 한다. 안채는 1910년경에 건축된 정면 7칸, 측면 1칸 반의 “역ㄱ자형”의 건물로 건너방 앞으로 5칸 규모의 아래채가 증축되었다. 안채의 평면은 좌로부터 건너방, 대청, 안방, 부엌 순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앞뒤로 전.후퇴가 발달하여 있다. 안채 건너방과 아래채 사이에는 높직한 반칸 폭의 마루형 툇마루가 꾸며져 있으며, 그 하부에는 건너방 부엌이 시설되어 있다. 안채는 홑처마의 민도리 집이다. 지붕은 좌우측의 형태가 다른데 좌측은 팔작지붕, 우측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중사랑채는 3량(樑)의 홑처마 민도리 집이다. 지붕은 남북측이 다른데 남측은 팔작지붕, 북측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고 낮은 건물이다. 대문채는 대문칸 1칸과 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고가는 경남지역의 근대 한옥으로 아래채와 사랑채의 병렬적인 배치, 진퇴가 발달한 평면 구성, 지붕 가구에 덧섯가래를 사용한 점, 창호의 의장성 구조와 의장의 불일치 등 근대기에 건축한 한옥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27
용담 임흘 관련 고전적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밀양대공원로 100
문의처
밀양시
소개
조선시대 학자요 의병장이었던 용담 임흘(龍潭 任屹:1557~1620)관련 고전적(龍潭 任屹 關聯 古典籍)은 용담유 고(龍潭遺稿 1卷), 용담취규정잡영 해서본 1권(龍潭翠叫亭雜詠 楷書本 1卷, 1599年), 용담취규정잡영 초서본 1 권(龍潭翠叫亭雜詠 草書本 1卷, 1600年), 임오사마방목 1卷 (壬午 司馬榜目 1卷, 1582年), 가례부해 4권(家禮附 解 4卷) 등 총 5종 6책 8권인데, 1993년 안동(安東)의 풍천임씨(豊泉任氏) 문중에서 발견되어 1997년에 밀양시 에 기증된 것이다. 선생의 본관(本官)은 풍천(豐川)으로 휘(諱)는 흘(屹), 자(字)는 탁이(卓爾). 호(號)는 용담 (龍潭)이다. 1582년에 실시한 사마시(司馬試)에 2등으로 올랐으나 곧 경북 봉화로 낙향하여 용담계곡에 집을 짓고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로 낙을 삼았다. 선생은 일찍이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제자인 소고 박승임(嘯 皐 朴承任)․ 월천 조목(月川 趙穆)․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수학하여 예학(禮學)에 밝 아 당세의 큰 그릇이라고 평가받았다. 특히, 한강(寒岡)선생은『그대는 도학(道學)에 침잠하기를 날로 깊은 맛 이 있으므로 내가 몹시 부러워하는 바다. 나는 그대와 같은 호예지인(好禮之人)과 늘 더불어 깊게 헤아리지 못 함이 애석하도다.』하였다. 이 고전적은 임흘(任屹)선생이 자연을 벗 삼아 지은 시를 동시대 의승병장인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직접 옮겨 적은 것으로,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사명대사가 쓴 초서는 물 흐르듯 써내려갔으나 글자가 또렷 하며, 앞뒤의 필체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힘찬 필법으로 국내는 물론 일본·중국 등 외국에서도 수작(秀作)으 로 정평이 나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종개(柳宗介) 등과 함께 의병을 창의하여 문경(聞慶) 일원에 서 왜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거두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옥서(典獄署)참봉, 동몽교관(童蒙敎官)에 각각 임명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로 정계가 혼탁하자 권귀(權貴)를 책망하는 상소를 올린 후 귀향, 모든 세상의 출입을 끊고 독서로 여생을 보내니 후세 사람들은 선생을 충의(忠義)의 선비이며 지조(志操) 높은 야인 (野人)으로 지칭하였다
28
밀양 미촌리 칠산정(密陽 美村里 七山亭)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단장면 구미3길 48-38
문의처
일직손씨경선제파종중
소개
칠산정은 일직손씨(一直孫氏) 시조인 손응(孫凝)의 20세손이며 격재 손조서(格齋 孫肇瑞)의 13세손인 칠산 손응용(七山 孫應龍:1741~1822)의 묘 아래에 지은 재실건축으로 철종 14년(1863년)에 창건후 소실된 것을 1906년에 중창한 것이다. 증손인 손건(孫建)이 1868년 9월에 창건하여 당호(堂號)를 모선재(慕先齋), 구호당(龜湖堂)이라 하였다. 그후 1895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6년에 5대손 손기형(孫基亨)이 중창하고 당호를 칠산정(七山亭)으로 바꾸었다. 현존하는 정당과 익사의 규모와 배치형태가 “모선정기(慕先亭記)”의 내용과 상당부분 부합하는 것으로 보아 1906년 창건당시의 모습에 준해 중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건축의 구조와 세부형식에도 이러한 건축연혁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정당의 마루는 재회(齋會)장소로, 좌우 온돌방은 제관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익사(翼舍)는 온돌방과 누마루를 겸비한 건물로 전사청, 직방 등의 기능으로 건축되었으며, 제수를 마련하는 주포(廚庖)의 기능은 방앗간채와 철거된 고직사가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당(正堂)은 전후퇴가 발달한 중당협실형 평면이나 온돌방 배면에 전시기에 볼 수 없었던 수장공간과 개방된 다용도 공간을 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정당 기둥배열에서 중앙부와 좌우 양끝이 다른 것은 구조적인 규범을 탈피하면서 평면구성의 변화를 추구한데 따른 것으로 근대초기 건축의 특징이다. 청송루(廳松樓)에 사분합 들문을 시설하여 필요시 마루와 온돌을 공간적으로 통합할 수 있게 한 것은 문중 제관들의 회합을 고려한 것이며, 마루 배면과 그 주위의 판문은 전통적인 판문의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 강당의 상부구조와 주량작(柱樑作)은 견실하며, 기둥과 들보의 규격과 형태, 치목은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전면으로 누마루가 돌출한 익사는 정당에 비해 정치(精緻)하고 고급스럽게 건축한 건물이다. 주두와 소로를 사용하여 수장한 누마루와 공간적인 통합이 가능하게 했다. 지형의 자연적인 경사를 살려 건물 끝에 누마루를 형성하는 수법은 이 시기 밀양지역 누정에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이다. 첨자형 부재를 사용하여 종도리 장여를 받는 수법은 정당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주량작에 비해 상부기구 구성에서 매우 견실하고 장식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20세기초 별업(別業)을 겸한 재실의 용도로 건축한 칠산정(七山亭)은 조선말기에서 근대초기에 이르는 격동기에 밀양지방 향반(鄕班)들의 재실 건축의 경향과 특징을 잘 보여준다.
29
밀양 퇴로리 서고정사(密陽 退老里 西皐精舍)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부북면 퇴로1길 43
문의처
여주이씨항재공파종중
소개
서고정사는 1898년에 항재(恒齋) 이익구(李翊九)가 1898년에 창건한 별서(別墅)로, 그는 교위공 이사필의 13세손이며 도원(桃源) 이종극(李鍾極)의 장남이다. 퇴로마을의 서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어 西皐精舍라 했으며, 그는 만년을 이 정사와 주변의 경관을 즐기시면서 교육과 독서, 저술에 전념 하였다. 항재 별세 후에는 그의 장자 성헌(省軒, 炳熹 1859-1938)과 차자 화하(華下, 炳壽 1861-1930) 형제가 이 정사에서 장수(藏守)했다. 서고정사는 전면 우측에 관리사를 두고 좌측 후부에 정사의 주공간을 배치한 형태이다. 외부공간은 크게 세 영역으로 구분되며, 각 영역의 경계에는 내담을 쌓았다. 먼저 항재(正堂)와 한서암으로 이루어진 정사(精舍)의 주공간과 관리인이 거주하는 관리사와 부속채로 이루어진 관리지원공간 그리고 연못인 활수당과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공간에는 항재와 한서암이 ‘역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항재 우측에 있는 관리사와 정사 사이에는 내담을 쌓아 공간적으로 구분하고, 출입을 위해 두 곳에 협문을 건축했다. 서고정사의 범위는 담장 안의 건축물은 물론 담 밖의 자연물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서고정사기에는 한서암 밖 작은 개울을 영과간(盈科澗)을 비롯 일제안(一躋岸), 과육천(果育泉), 제가곡(霽佳谷), 우경평(耦耕坪), 곡구림(谷口林), 사우정(四友亭), 심진경(尋眞徑)을 모두 서고정사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는 조선중기의 유학자들이 강학과 장수의 공간으로 즐겨 지었던 정사건축의 조영전통을 따른 것이다. 정당인 항재(恒齋)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의 홑처마 장혀수장 팔작집이다. 평면은 한 편 마루형으로 정면 왼편에 2칸 마루를 두고 오른편에 온돌방 2칸을 배설한 형태이다. 이처럼 마루를 왼편에 둔 것은 한서암과 활수당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다. 청방간(廳房間)에는 사분합 들문을 달아 마루와 온돌방을 한 공간으로 통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정당의 2칸 마루는 역락(亦樂)이라 편액했으며, 이는 논어 학이편에서 취한 것이며, 2칸 온돌방은 항재 이익구의 호를 따서‘항재(恒齋)’라 편액했다. 한서암(寒棲庵)은 정면 3칸, 측면 2칸(우측면은 1.5칸) 규모의 장여수장 팔작집으로, 당호는 주자(朱子)의 반초은(反招隱)에서 취한 것이다. 평면은 1칸 마루와 2칸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못인 활수당에 면해 2칸 마루를 꾸미고, 그 주위에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마루는 온돌방에 비해 정면으로 반 칸을 더 내밀어 2칸(1× 2칸)의 비교적 넓은 공간을 형성했다. 이는 활수당에 면해 마루를 다양한 용도로 쓰기 위해 최대한 넓게 형성하려고 한 결과이다. 마루 배면에는 판벽을 치고 주간에 두 짝의 울거미 판문을 달았다. 廳房間에는 삼분합 들문이 달려 있어 마루와 방을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하여 사용할 수 있다. 정당과 한서암에는 經世致用을 주장한 건축주 항재 이익구의 건축관의 반영되어 있다. 대청을 가운데 두는 일반적인 中堂夾室形 평면을 고집하지 않고 활수당, 침우천, 영과천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한편 마루형으로 건축했다. 두 건물 공히 활수당에 가까운 곳에 마루를, 그 맞은편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온돌방에는 책 등을 보관할 수 있는 수장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正堂인 항재와 한서암에 사용된 재목은 일정한 크기로 규격화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질박하고 간결한 구조가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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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범평리 성재정 소장 고문서(密陽 汎平里 成在政 所藏 古文書)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초동면 초동중앙로 439 미리벌민속박물관
문의처
성재정
소개
초동면 범평리 미리벌민속박물관(館長:成在政)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는 고종 연간에 효행을 천거하는 상서(上書) 2점과, 산송(山訟)관련 문서 9점, 그리고 호구단자(戶口單子) 46점 등 모두 57점이다. 1.효행(孝行)을 천거하는 상서(上書 : 2점) 이 상서는 진주(晉州)에 거주하는 사족(士族)들이 해당 고을에 사는 사족인 허성(許珹)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모친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있기로 이를 천거(薦擧)하여 정려(旌閭)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 상서이다. 2점의 상서 중에 한 점은 고을 수령에게 올린 것이고, 다른 한 점은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올린 것이다. 2.산송(山訟) 관련 문서(9점) 한 때 고성(固城)에 거주했으며 진주(晉州)에 세거하고 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들이 고성 대둔면(大屯面) 화암동(禾巖洞)에 있는 선산(先山) 근처에 다른 사람들이 투장(偸葬 : 몰래 장사지냄)한 것과 관련하여 소송을 벌리면서 작성된 문서들이다. 소송은 1887년부터 1890년까지 전개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문서는 소지(所志) 6점, 상서(上書) 1점, 수표(手標) 1점, 산도형(山圖形) 1점 등 모두 9점이 남아 있다. 사건의 내용은 고성군 대둔면 박달동(博達洞)에 거주하는 정병구(鄭炳九)라는 사람이 대둔면 화암동에 있는 성윤(成潤), 성율(成凓) 형제의 어머니 묘소 근처에 몰래 무덤을 조성한 것에 대하여 기한을 정하여 묘를 옮기겠다는 수표(手標)를 받았지만 정씨 측에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다투고 있는 와중에, 다시 광일면(光一面) 가곡리(佳谷里)에 사는 황재근(黃在根)이란 자가 또 다시 투장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성윤 등이 관아에 소지(所志)를 올리면서 묘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관에서는 정씨와 황씨측에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하였다. 그 뒤에도 이행을 둘러싼 마찰로 소송은 계속되어 관찰사(觀察使)에게까지도 재소하게 되었다. 이 자료는 관련 소송에서 성씨 등이 승소(勝訴)하였지만 황씨는 1890년까지도 묘를 이장하지 않아 계속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호구단자(戶口單子:46점) 호구단자 46점 중 영조 2년(병오, 1726)에 만들어진 호구단자가 가장 오래된 것이고, 고종 31년(甲午, 1894)에 만들어진 것이 가장 나중에 작성된 것이다. 시기별로 보면, 18세기의 것이 12점이고, 나머지는 모두 19세기의 것이다. 호주별로 보면: 성언(成木彦:1648~ ?) 1점, 전주최씨(成大重의 처) 1점, 성동집(成東木咠-東耈서 개명:1725~1794) 9점, 성사무(成師茂:1749~1808), 성치원(成致源:1780~1865) 7점, 성영규(成永奎-斗奎에서 개명:1813~1871) 10점, 성복규(成馥奎:1811~1871) 2점, 성의규(成懿奎:1816~1860) 3점, 성담(成淡:1833~1902) 6점, 성윤(成潤:1839~1903) 6점 등이다. 여기에 적시된 사람들 대부분은 남명(南冥 曺植)의 문인으로서 조선중기 진주 및 인근고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인 부사 성여신(浮査 成汝信)의 차남인 성용(成鏞)의 후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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