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강과 국도25호선이 접하며 시내방면에서 첫번째 마을로 상남면사무소와 3km 거리에 있으며, 법정리는 예림리이다. 본래 이 마을은 운례리라 하였는데 당촌과 나란히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운례와 당촌을 1구와 2구로 나누는 한편 운하, 운내, 양림간, 당촌, 동촌, 대성동 등으로 마을을 구분하고 있다. 예림으로 한 것은 1635년(인조 13, 을해)에 덕성리(현 밀양시 활성이동)에 있었던 점필서원을 이 곳으로 옮겨 예림서원이라 함으로써 마을 이름도 예림으로 했다는 정설이 있다. 법정 예림리의 행정리는 예림1ㆍ2, 양림간, 운하, 운내, 당촌, 대동, 동촌,대성리 등이 있다.
예림리 일대에서는 오래 전부터 패총 유물과 석기,철기 등 청동기 시대 의 유물발굴 보고가 있어 선사시대의 주거지임을 확인시켜 주 고 있다. 또 동리에는 예림서원의 구지(舊址)를 비롯하여 마암연, 어기 소(魚磯沼), 운례수 등의 고적 명소가 밀양지 등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상남수출딸기작목반 | 354-992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고추작목반 | 355-599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원예영농법인 | 354-9855 | 2.5kg~3kg | 1,200원 |
상남면사무소와 3km 거리에 있으며, 법정리는 예림리 이다. 예림1리와 같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구분된 마을이며, 동으로는 밀양시, 서남으로는 기산리, 북으로는 부북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 마을일대에서는 오래 전부터 패총 유물과 석기, 철기 등 청동기 시대의 유물 발굴 보고가 있어 선사시대의 주거지 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동리에는 예림서원의 구지를 비롯하여 마암연, 어기소, 운례, 등의 고적 명소가 밀주지 등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예림리 주민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수도작과 딸기, 고추, 깻잎등 시설채소를 재배 한다.
예림리 일대에서는 오래 전부터 패총 유물과 석기,철기 등 청동기 시대 의 유물발굴 보고가 있어 선사시대의 주거지임을 확인시켜 주 고 있다. 또 동리에는 예림서원의 구지(舊址)를 비롯하여 마암연, 어기 소(魚磯沼), 운례수 등의 고적 명소가 밀양지 등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예림으로 한 것은 1635년(인조 13, 을해)에 덕성리(현 밀양시 활성2동) 에 있었던 점필서원을 이 곳으로 옮겨 예림서원이라 함으로써 마을 이 름도 예림으로 했다는 정설이 있다. 법정 예림리의 행정리는 예림1ㆍ2, 양림간, 운하, 운내, 당촌, 대동, 동 촌,대성리 등이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상남수출딸기작목반 | 354-992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고추작목반 | 355-599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원예영농법인 | 354-9855 | 2.5kg~3kg | 1,200원 |
밀양강 제방을 끼고 있는 마을로 예림리 동쪽에 위치하며, 상남면사무소와 3km 거리에 있으며, 법정리는 예림리 이다. 옛날에 강물의 범람을 막아 전답을 보호하고자 심은 운례수 한가운데 숲과 숲 사이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양림간 마을이라 했으나 지금 그 숲은 없어졌다. 일제 시대 초기에는 일본인 농민들이 집단 이주한 마을 이었 으며, 시설채소 집단지역으로 고추, 딸기, 수박, 깻잎 등 을 재배하며, 광활한 하천부지에 배추, 무 등도 대량 생산하고 있음.
옛날에 강물의 범람을 막아 전답을 보호하고자 심은 운례수 한가운데 숲과 숲 사이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양림간 마을이라 했으나 지금 그 숲은 없어졌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일본인 농민들이 집단 이주한 마을이었으며 지금도 고등채소를 재배하는 농민들이 살고 있다.
예림으로 한 것은 1635년(인조 13, 을해)에 덕성리(현 밀양시 활성이동) 에 있었던 점필서원을 이 곳으로 옮겨 예림서원이라 함으로써 마을 이 름도 예림으로 했다는 정설이 있다. 법정 예림리의 행정리는 예림1ㆍ2, 양림간, 운하, 운내, 당촌, 대동, 동 촌,대성리 등이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상남수출딸기작목반 | 354-992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고추작목반 | 355-599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원예영농법인 | 354-9855 | 2.5kg~3kg | 1,200원 |
예림리 본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운례에서 파생된 이름 으로 유래되며, 운례의 아랫마을이라는 뜻으로 그 안 마을 에 해당하는 운내와 대칭되는 지명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오랫동안 상남의 공설시장이 있었던 곳이며, 울리, 운례라고 불리었다. 상남면사무소와 2.5km 거리에 있으며, 법정리는 예림리로 주민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수도작 및 딸기, 고추, 깻잎 등 시설채소를 재배하고 있음.
운하마을(울리, 運禮) : 예림 본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운례에서 파생된 이름인 듯하다. 운례의 아랫마을이라는 뜻으로 그 안 마을에 해당하는 운내와 대칭되는 지명이다.
예림으로 한 것은 1635년(인조 13, 을해)에 덕성리(현 밀양시 활성이동) 에 있었던 점필서원을 이 곳으로 옮겨 예림서원이라 함으로써 마을 이 름도 예림으로 했다는 정설이 있다. 법정 예림리의 행정리는 예림1ㆍ2, 양림간, 운하, 운내, 당촌, 대동, 동 촌,대성리 등이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상남수출딸기작목반 | 354-992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고추작목반 | 355-599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원예영농법인 | 354-9855 | 2.5kg~3kg | 1,200원 |
예림리에서 가장 안쪽 산 밑에 있다 하여 안골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운례라는 옛 마을로 경주 최씨가 제일먼저 살았다. 운례의 이름에 대한 유래는 을자형으로 굽이 돌아 흘러온 응천강 물이 이 마을 앞에 이르러 정체되지 않고 운세대로 직류하는 곳이라 하여 운류가 운례로 표기되었다는 밀주지의 기록이 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마을 동쪽 강변에 침수를 막기 위하여 탱자와 가시나무를 심어 전답을 보호했는데 그것이 유명한 운례수를 이루었다. 이 마을에 있었던 예림서원은 1678년(숙종4)과 1680년(숙종6) 두 차례의 화재로 1680년에 부 북면 후사포리 서쪽으로 이건되어 지금은 그 자취만 남아 있다. 또 이 마을은 조선 성종 때부터 점필제 선생의 사위인 진사 유 세미가 자리를 잡은 후 오랫동안 전주 유씨의 거주지가 되었다. 송계 신계성의 후손들인 평산 신씨도 이 마을에 새거하여 가문 을 빛냈다.
운례의 이름에 대한 유례는 을자형으로 굽이 돌아 흘러온 응천강 물이 이 마을 앞에 이르러 정체되지 않고 운세대로 직류하는 곳이라 하여 운 류가 운례로 표기되었다는 밀주지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마을 동쪽 강변에 침수를 막기 위하여 탱자와 가시나무를 심어 전답을 보호했는데 그것이 유명한 운례수를 이루었다.
이 마을에 있었던 예림서원은 1678년(숙종4)과 1680년(숙종6) 두 차례의 화재로 1680년 부북면 후사포리 서쪽으로 이건되어 지금은 그 자취만 남아있다.
예림으로 한 것은 1635년(인조 13, 을해)에 덕성리(현 밀양시 활성이동) 에 있었던 점필서원을 이 곳으로 옮겨 예림서원이라 함으로써 마을 이 름도 예림으로 했다는 정설이 있다. 법정 예림리의 행정리는 예림1ㆍ2, 양림간, 운하, 운내, 당촌, 대동, 동 촌,대성리 등이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상남수출딸기작목반 | 354-992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고추작목반 | 355-599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원예영농법인 | 354-9855 | 2.5kg~3kg | 1,200원 |
예림 안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어느 여름에 한 선비가 말을 타고 가다가 갈증이 나서 물을 찾았으나 물이 없어 두리번거리다가 잠시 앉아 쉬고 있었는데 그 동안에 타고 온 말이 말발굽으로 땅을 파서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었는데 그 물맛이 꿀맛같이 달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후 사람들이 단물이 나는 샘이라 하여 단샘 또는 단천 이라 했으며, 단천의 마을이란 뜻으로 단촌, 당촌으로 전와한 지명이라 한다. 지금도 마을 어귀에 있는 샘터가 바로 그 원천이라 하며 물맛이 시원하고 달다고 한다. 상남면사무소와 2 km 거리에 있며, 맥문동 재배농가가 많음.
당촌(단촌,단천,唐村,唐泉) : 예림 안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어느 여름에 한 선비기 말을 타고 가다가 갈증이 나서 물을 찾았으나 물이 없어 두리번거리다가 잠시 앉아 쉬고 있었는데 그 동안에 타고 온 말이 말발굽으로 땅을 파서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 었는데 그 물맛이 꿀맛같이 달았다고 하여 그 후 사람들이 단물이 나는 샘이라 하여 단샘 또는 단천이라 했으며, 단천의 마을이란 단촌,당촌으 로 전와(轉訛)한 지명이라 한다.
예림으로 한 것은 1635년(인조 13, 을해)에 덕성리(현 밀양시 활성이동) 에 있었던 점필서원을 이 곳으로 옮겨 예림서원이라 함으로써 마을 이 름도 예림으로 했다는 정설이 있다. 법정 예림리의 행정리는 예림1ㆍ2, 양림간, 운하, 운내, 당촌, 대동, 동 촌,대성리 등이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상남수출딸기작목반 | 354-992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고추작목반 | 355-599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원예영농법인 | 354-9855 | 2.5kg~3kg | 1,200원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예림리 당촌마을의 일부이었으나, 1990년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어 1994년까지 택지조성을 하였으며, 1995년 대동아파트 건립으로 1997년 주민이 입주 하였으며, 1998.1.1자 대동리로 행정 명칭이 변경 되었음. 면사무소와 2.0km 거리이며, 아파트 단지이다.
예림앞 들 가운데 있는 마을로 일제강점기때에 형성되었다. 일본인 농장주 탕천이란 자가 계속하여 양철집을 짓고 살았으며, 그 후에도 계속하여 일본인 농부들이 즐겨 양철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자연 양철집 마을이 되었다. 그리하여 양철마라는 이름이 생겼고 예림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동촌이라 불렀다. 상남면사무소와 3.5km 거리에 있며, 시설채소 재배 지역임.
예림 앞 들 가운데 있는 마을로 일제강점기때에 형성되었다. 곧 일본인 농장주 탕천이란 자가 계속하여 양철집을 짓고 살았으며, 그 후에도 계 속하여 일본인 농부들이 즐겨 양철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자연 양철집 마을이 되었다. 그리하여 양철마 라는 이름이 생겼고 예림의 동쪽에 위 치한다 하여 동촌이라 불렀다. 또 옛날 이 부근에는 참나무숲이 있었으므로 참나무징 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예림으로 한 것은 1635년(인조 13, 을해)에 덕성리(현 밀양시 활성이동) 에 있었던 점필서원을 이 곳으로 옮겨 예림서원이라 함으로써 마을 이 름도 예림으로 했다는 것이 정설이 있다. 법정 예림리의 행정리는 예림1ㆍ2, 양림간, 운하, 운내, 당촌, 대동, 동 촌,대성리 등이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상남수출딸기작목반 | 354-992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고추작목반 | 355-599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원예영농법인 | 354-9855 | 2.5kg~3kg | 1,200원 |
상남면사무소와 3.2km 거리에 있며, 시설채소 재배 지역으로 예림리와 기산리에 걸쳐 있는 들마을 이다. 일본인들이 몇가구 거주할 때는 천년촌 이라고 하였으나 해방직후 일본갔던 귀향동포들이 마을을 형성하면서 부터 크게 발전하라는 뜻에서 대성동이라 하였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넓은 강을 지메를 집고 강을 건넜다 하여 지메등 이라고 하였다. 대성동에서 약1㎞ 남쪽들에 1941년도 일본군이 비행장을 만들었으나 1945년 해방이 됨으로서 만주로 갔던 귀향 동포들이 비행장을 마을로 만들어 후생촌 이라고 불렀으나 1973년 경지정리를 할 때 철거하였다.
기산리와 예림리에 걸쳐 있는 들마을인데 일부는 기산리에 일부는 예림 리에 속해 있는 신생 마을이다. 큰 성공을 기원하는 동민들의 뜻을 풍 기는 지명이다.
예림으로 한 것은 1635년(인조 13, 을해)에 덕성리(현 밀양시 활성이동) 에 있었던 점필서원을 이 곳으로 옮겨 예림서원이라 함으로써 마을 이 름도 예림으로 했다는 정설이 있다. 법정 예림리의 행정리는 예림1ㆍ2, 양림간, 운하, 운내, 당촌, 대동, 동 촌,대성리 등이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상남수출딸기작목반 | 354-992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고추작목반 | 355-599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원예영농법인 | 354-9855 | 2.5kg~3kg | 1,200원 |
고노실 북쪽 산 기슭에 위치하였고 고노실 보다 먼저 생긴 마을 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고노실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고내실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고노(古老) 또는 고노(古魯)로 표기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ㆍ폐합시 기산리로 명칭 되었으나, 1990년 택지 개발지구로 지정되어 1994년 까지 사업을 착수하여 주택을 건립 하였으며, 점차 인구가 증가하여 1998.1.1자 행정리로 되었음. 면사무소와 1.5km 거리이며, 맥문동 재배 주산지임.
고노실 북쪽 산 기슭에 위치하였고 고노실보다 먼저 생긴 마을이라고 붙여 진 이름인데, 고노실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 라는 뜻에서 고내실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었으나 대채적으로 고노(古魯) 또는 고노(古老)로 표기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주농가) |
---|---|---|---|---|
가산리 | 355-2431 | 600g | 7,000원 | 경기도 |
종남산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에 따라 푹실과 고늬실을 합하여 기산리가 되었다. 면사무소와 1km 거리 이며, 수도작과 시설채소를 재배함. 기산은 본래 키산으로 표기했는데 그것은 뒤쪽의 산 형세 가 키 모양과 같다고 해서이다. 그러나 키는 앞이 트여 벌 어져서 키질을 할 때마다 곡식이 날아가므로 마을의 복과 부가 빠져 나가서는 안 된다하여 키의 앞쪽에 해당하는 마을 앞을 가로 막는다는 뜻에서 기산으로 이름을 바꾸었 다 한다. 그리하여 마을 앞에 길게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 었는데, 현재 국도변에 우거진 고목의 숲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기산에 대한 마을 이름의 유래는 중국 상고시대의 허유,귀부의 기산유 수의 고사에서 취했다고 한다. 효 임금이 나라를 물려 주려는 뜻을 허유에게 밝히자 그는 도리어 안 들을 소리를 들었다 하여 자기의 귀를 유수에서 씻고 있는데 소를 몰고 강가를 지나가던 귀부가 이를 보고 더 러운 소리를 들은 귀를 씻은 물이라 하여 그 소에게 조차 물을 먹이지 않았다는 고사이다. 이는 허유, 귀부와 같이 세속을 초월한 채 지조를 지키고 숨어 살 수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곳으로 여겨진다.
마을 안에는 몇 기의 지석묘 등 선사 시대의 유적도 발견되어 이 마을이 먼 옛날붜의 주거지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상남수출딸기작목반 | 354-992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고추작목반 | 355-599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예림원예영농법인 | 354-9855 | 2.5kg~3kg | 1,200원 |
면사무소 소재지 마을로, 수도작과 시설채소를 재배하는 농가 구성되어 있음. 기산리 본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는 골짜기로 이루 어진 터전이었으나 아주 오랜 옛날에 큰 비가 내려 산사태가 지 는 바람에 골짜기가 온통 메워져 평지와 같이 되었다. 조선 광 해조 때 윤홍이 이 곳에 터전을 잡아 파평 윤씨가 살았고, 그 후 숙종 때는 주범 이산수가 청도에서 이 마을로 옮겨 살아 경주 이씨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그 후손들이 선산 아래 지어 선조를 추모하고 있다.
푹실이란 지명은 골짜기에 산이 푹 내려 않아 마을이 이루어 졌다는 데 서 생긴 것이고, 반곡이란 표기는 큰 비로 인하여 동네가 된 골이라는 뜻이다.
마을 안에는 몇 기의 지석묘 등 선사 시대의 유적도 발견되어 이 마을이 먼 옛날붜의 주거지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내금 마을의 북서쪽에 위치한 고촌이다. 지명을 이듬, 이드미, 이담이라 한 것은 옛날 이동음부곡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연 (伊淵)이라 한자 표기는 옛날 이곳에 유연이라는 못이 있어 이동 음과 가연 이라는 이동음과 가연 두 지명을 아울러 취한 듯하 다. 조선 초기 이래 창녕 조씨의 세거지로서 명종 때 이 곳의 큰 부호였던 아연 조말손은 삼남에 큰 기근이 있자 수만금을 희사하여 백성을 구휼하였다. 또 그 손자인 조계양은 임진왜란 때 창의 하여 이등공신이 되었는데 만년에 그가 세운 정관당은 후인들이 구학소로 삼아 지금도 보존되고 있으며, 자연마을으로 말림이 있다 대부분 농가로 수도작과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연금딸기작목반 | 354-992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연금고추작목반 | 355-599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안쪽에 있는 금동이라 하여 내금이라 하였는데, 외금과 대 칭되는 지명이다. 본래 금동은 옛날에 금동역이 있었던 곳 으로 동으로 무흘역(삼랑진읍)까지 25리, 서쪽으로 수안역 (무안면)까지 35리, 남으로 양동역(하남읍)까지 30리인데 사 방팔방으로 역원을 둔 영남대로상의 교통요충지였다. 또 중세 이래 이동음부곡의 중심지로 일명 금산 이라고도 했으며, 처음에는 이동음신역을 두었으나 그 후 금동역 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후에는 역이 인근인 백족으로 한 때 옮겼다가 다시 마산원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농업에 종사하며, 수도작과 시설채소를 재배한다.
금동(金洞)을 지금과 같이 금동(今洞)으로 지명을 바꾼것은 금자(金字)의 뜻 이 강하고 소리가 나며 부딪힐 때 불꽃이 튄다 하여 부드럽게 완화하기 위하여 같은 음(音)인 금자(今字)로 취한 것이라.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연금딸기작목반 | 354-992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연금고추작목반 | 355-599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내금의 동남쪽 국도변에 있는 큰 마을이다. 일명 역금동 이라 한 것을 보면 이 곳이 옛날 금동역의 역말 중심이며 내금이 대칭되는 마을이며, 자연마을으로 세미실, 여시태 가 있다. 기록상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영남대로의 교통 요충지로서 그 전성시에는 역장을 비롯한 역사,역졸,관노,관비 등 종사 원만도 300명이 넘었고 대, 중, 하로 구분한 역마가 수십 필 이나 되어 왕래하는 관인들과 여행객으로 붐빈 도회였다 고 한다. 지금도 내금과의 사이에 있는 들판을 마굿들 또는 말미답이 라 하는데, 역마의 사료를 생산 제공하기 위한 공용답으로 그 면적이 만여 평이나 되었다. 또 인근에는 조화원이란 원집터도 있었는데 원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에 폐지 되었다. 대부분 농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도작과 특용작물을 재배함.
여시태(여히태, 狐峴) : 외금 마을 남쪽 여시태의 고개 밑 마을터인데 지금은 인가가 없어졌다. 여시태 고개는 옛 기록에 호현(狐峴)으로 되어 있으며, 금동역 아래쪽에서 수산현에 이르는 고개라 하였고 여시는 여 우,태는 티 곧 현의 변화된 음이다.
내금의 동남쪽 국도변에 있는 큰 마을이다. 일명 역금동이라 한 것을 보면 이곳이 옛날 금동역의 역말 중심이며 내금에 대칭되는 마을이다. 기록상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영남대로의 교통 요충지로서 그 전성시에 는 역장을 비롯한 역사, 역졸, 역노, 관비 등 종사원 만도 300명이 넘었 고 대, 중, 하로 구분한 역마가 수십 필이나 되어 왕래하는 관인들과 여 행객으로 붐빈 도회였다고 한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연금 딸기 작목반 | 352 - 2607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연금고추작목반 | 353-0111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연금리 | 354-0090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평촌이란 지명은 평평한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 여진 이름이다. 대밭이 있었다고 대밭골이라 했는데, 배 산임수의 평화스러운 마을이며, 임진왜란때 이 마을만 피 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평촌이라는 명칭이 유래 되었으며, 갈수록 인구가 늘어나 1982. 9. 1일자 1ㆍ2ㆍ3리로 분동하 였다. 옛날 응천강 제방이 축조되기 전에는 예림에서 오산 까지 강변에는 홍수가 잦아서 경지보다는 늪과 갈대밭으로 황무지였다. 조선 영조때 호군 진대곤이 이마을에 정착한 이 후, 진씨의 세거지가 되었고, 진주 강씨도 대대로 살고 있 다. 대부분 농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도작과 특용작물을 재배함.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평촌 딸기 작목반 | 352 - 6859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평촌고추작목반 | 352-9912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평촌리 | 352-9606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평촌이란 지명은 평평한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 여진 이름이다. 배산임수의 평화스러운 마을이며, 임진왜 란때 이 마을만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평촌이라는 명칭 이 유래되었으며, 갈수록 인구가 늘어나 1982. 9. 1일자 1ㆍ2ㆍ3리로 분동 하였다. 옛날 응천강 제방이 축조되기 전에는 예림에서 오산까지 강변에는 홍수가 잦아서 경지보 다는 늪과 갈대밭으로 황무지였다. 조선 영조때 호군 진대곤 이 이 마을에 정착한 이후, 진씨의 세거지가 되었고, 진주 강씨도 대대로 살고 있다. 오래전에 못이 있었다 하여 못뚝걸이라는 이름이 있다 대부분 농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도작과 특용작물을 재배함.
못뚝걸(池堤) : 지금의 평촌 2동의 다른 이름인데, 옛날 이곳에 못이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그 못은 메워져 그 자리에는 동사무소가 세워졌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평촌 딸기 작목반 | 352 - 6859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평촌고추작목반 | 352-9912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평촌리 | 352-9606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밧마, 바끗마 등으로 불리었는데, 평촌이란 지명은 평평한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산임수 의 평화스러운 마을이며, 임진왜란때 이 마을만 피해를 당 하지 않았다고 평촌이라는 명칭이 유래 되었으며, 갈수록 인구가 늘어나 1982. 9. 1일자 1ㆍ2ㆍ3리로 분동하였다. 옛 날 응천강 제방이 축조되기 전에는 예림에서 오산까지 강 변에는 홍수가 잦아서 경지보다는 늪과 갈대밭으로 황무지 였다. 조선 영조때 호군 진대곤이 이 마을에 정착한 이후, 진 씨의 세거지가 되었고, 진주 강씨도 대대로 살고 있다. 대부분 농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도작과 특용작물을 재배함.
밧마(外村, 배끗마) : 평촌 본 동 북동쪽에 있는 지금의 평촌 3동을 말한다. 본동의 바깥에 있다하여 밧마, 바끗마, 배끗마 등으로 불리운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평촌 딸기 작목반 | 352 - 6859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평촌고추작목반 | 352-9912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평촌리 | 352-9606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평촌에서 동북쪽 응천강가에 자리잡은 들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1930년 전후에 응천강 제방공사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숙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지은 가건물을 공사를 마친 후에 개조하여 민가로 삼고 그 자리에 눌러 앉음으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은 당시 주민들이 부지런히 일해서 크게 일으켜 보자는 결의의 뜻으로 1932년 에 마을 총회에서 결정한 것이라 한다. 수도작과 시설채소를 재배하는 농가로 구성 되어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평촌 딸기 작목반 | 352 - 6859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평촌고추작목반 | 352-9912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평촌리 | 352-9606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동네 안산이 말처럼 생겼다 하여 말미라 불리어 오고 있 는 고촌이다. 이마을 서쪽에 이웃해 있는 무량원이란 관영 여숙이 조선 초기에 폐쇄되어 옮겨온 후 마산원이 되었으 며, 조선 후기에는 금동역이 백족으로 옮겨지고, 백족에서 다 시 이 마을로 옮겨짐에 따라 마산원이 역으로 승격된 바 도 있다. 옛날에는 이 마을 산천의 경색도 매우 아름다워 서 조선 초기의 큰 학자인 사계 서거정은 밀양 팔경의 하 나로써 마산의 지나가는 비를 시로 읊었다. 자연마을으로 누르미, 갓골미, 똥매 등의 명칭이 있다. 단감 주산지이며 수도작과 시설채소 재배하는 농가로 구성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당시 동산리 세천에 속해있던 무량원을 합치 고 말미(마산)와 느리미(만산)마을을 합쳐서 하나의 법정리가 된 곳이다.
마을 안 이곳 저곳에서 지석묘와 각종 석기,패총 유물 등 매장 문화재 가 발견된 일이 있어 선사시대 이래의 주거지임을 짐작하게 하는 곳이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마산딸기작목반 | 352 - 995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마산리 | 353-0049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마산리 서북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이며 조선 초기 이래 원터가 남았다. 원이란 역과 역 사이 또는 역 부근에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들을 위하여 설치한 국영의 여객 소 같은 곳인데 원집 이라고도 하였다. 원집에는 원주를 두어 소속된 전답을 경작하여 겨우 충당을 했으며 인근의 승려들을 원주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이 곳에도 옛날부터 절이 있었으며 무량이란 지명도 절이름과 관계가 있는 곳 으로 추정된다. 무량원은 금동역과 하남면 양동역 사이의 원으로 그 북쪽 산자락에 점필제 김종직 선생의 묘소가 있었으나 연산군 무오사화 때 부관 객사 참회참시를 당한 후 부북면 대동리 생가 곁으로 이장하였다. 따라서 이 때 에 무량원은 폐쇄되고 마산리로 원을 이전하였다. 임진왜 란 후에 생원 이경운이 입촌하여 성주 이씨의 구거지가 되었다. 화훼 집단 재배지이며 단감 및 수도작에 종사하고 있다 .
당집 : 마산리 서북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이며 조선 초기 이래의 원(院) 터가 남아있다. 원이란 역과 역 사이 또는 역 부근에 공용으로 여행하 는 관원들을 위하여 설치한 국영의 여숙소(旅宿所) 같은 곳인데 원집 이라고도 하였다. 원집에는 원주를 두어 소속된 전답을 경작하여 경비충당을 했으며 인근의 승려들을 원주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이 곳 에도 옛날부터 절이 있었으며 무량이란 지명도 절 이름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림으로 한 것은 1635년(인조 13, 을해)에 덕성리(현 밀양시 활성이동) 에 있었던 점필서원을 이 곳으로 옮겨 예림서원이라 함으로써 마을 이 름도 예림으로 했다는 정설이 있다. 법정 예림리의 행정리는 예림1ㆍ2, 양림간, 운하, 운내, 당촌, 대동, 동 촌,대성리 등이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마산딸기작목반 | 352 - 9958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마산리 | 353-0049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종남산 줄기가 어질게 마을쪽으로 뻗었다 하여 인산으로 부르고 있다고 전한다. 옛날에는 마산파에 있는 돌더미에 서 백마가 나타나 강물을 먹고는 사라져 버린 기이한 일 이 일어났다. 그때 백마가 남긴 발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 는데 백말의 발자국에서 이름을 따서 백족이라 부르고 있다 가 그후 배죽으로 바뀌었다. 마산역이 있을 때 말을 먹이기 위하여 짚을 생산하는 마구들이 마을앞에 있었으며 지금도 마구들이라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웃세천 동남쪽에 있는 당골마을과 배죽 서북 쪽에 있는 소배죽 마을인데 배죽보다 작은 마을이라 하 여 붙여진 이름이다. 상남면사무소와 7km 거리이며 수도작 과 딸기, 참외, 수박 등 시설채소와 단감 재배 농가로 구성 되어 있다.
중세천 동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는 운막향의 옛터라 하여 속칭 백족(白足)이라고 표기하였다. 배죽은 백족에서 변화 된 음으로, 옛날 마산 앞에 있는 돌더미에서 백마가 나타나 강물을 마 시고 사라져 버린 뒤에 그 발자국을 남겼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동산딸기작목반 | 353-5224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동산고추작목반 | 352-960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동산리 | 352-6609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배죽의 남쪽 들가운데의 서쪽 야산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동산이라는 독뫼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촌인데 어은동과 외산리와 인접하였다. 조선 후기에 창녕 조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으며, 창녕 성씨의 구거지이기도 하다. 또 여흥 문씨의 세거지로서 한말에 민치홍이 세운 추양제 라는 제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마산리에서 동산리까지 3,590m길이의 응천강 하류에 면한 밀성제와 동산과 삼랑진읍 미전리 사이로 흐르는 응천 강을 건너는 돌티미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상남면사무소와 7.8km 거리이며 수도작과 딸기, 참외, 수박등 시설채소 및 감자 재배 농가로 구성 되어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동산딸기작목반 | 353-5224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동산고추작목반 | 352-960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동산리 | 352-6609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임진왜란 직후 광산 김씨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다 하며, 성씨 김을 더욱 빛낼려면 냇물에 씻으면 빛난다고 하여 세천으로 동명을 지었다고 전한다. 마을을 웃마, 중마, 매나무골로 구분 부 르고 있는데, 웃마는 세천의 맨 위쪽에 있다하여 상촌 또는 상 세천이라 했으나 사실은 세천의 본동이다. 국도25호선 인근 마을로 상남면사무소와 9km 거리이며 단감, 시설고추, 수도작 재배 농가로 구성되어 있다 .
세천이란 이름은 조선 현 숙종 때 이 마을에 점거하여 세거지로 삼은 광 산 김씨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한다. 중마는 웃마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세 천 세 땅 중 가운데 있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매나무골은 세천의 가장 아 래쪽 마을의 지명으로 이 곳에 매화나무가 많이 있었다하여 매화곡 또는 매목곡으로 표기해 왔으며 매화나무골에서 성세, 전음된 매나골이 되었다 하세천이란 다른 이름도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동산딸기작목반 | 353-5224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동산고추작목반 | 352-9604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동산리 | 352-6609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외산리의 본동으로 행정구역이 다른 동산리와는 작은 골목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동쪽 들 가운데에 있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골안처럼 아늑하고 소쿠리처럼 생긴 곳이라 하여 골안, 고란, 소쿠리쿰, 고내, 곡내(谷內)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마을이 있으며 상남면사무소와 8km 거리이며 수도작 및 시설채소, 감자 재배 농가로 구성되어 있다 .
당집 : 외산이란 지명에 대하여는 오산들 너머에 있는 바깥 산마을이라는 일설 과 동산 바깥에 있는들 마을이라는 다른 일설이 전해지고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외산딸기작목반 | 352-3052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외산고추작목반 | 353-1860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외산리에서 가장 큰 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인데 오미 또는 오산이라 부른다. 한자상의 표기로는 원래오산(鰲山) 이었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독뫼의 형상이 자라 처럼 생겼다 해서 생긴 이름인데 그 뒤 오산(吳山)으로 바뀌 어진 것은 글자 쓰기가 너무 어려운데다가 이 마을에 오씨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바꾸었다는 일설과 낙동강 이 범람하여 온 들판이 물에 잠겼는데 이 마을 독뫼의 꼭 대기만 물 위에 나와 있어 그 곳에 까마귀기들만 남아 있어 기인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마을내에는 1,780m 길이의 외산제와 들 가운데 똥뫼라는 작은산이 있으며, 디깨미나루터, 처자매등, 오산벌 등이 있다. 상남면사무소와 10km 거리이며 딸기, 참외등 시설채 소와 낙동강변 모래땅에 대규모 감자를 재배하고 있다.
당집 : 외산이란 지명에 대하여는 오산들 너머에 있는 바깥 산마을이라는 일설 과 동산 바깥에 있는들 마을이라는 다른 일설이 전해지고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외산딸기작목반 | 352-3052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외산고추작목반 | 353-1860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큰 어은동과 작은 어은동으로 땅이 나누어져 있다. 풀숲이 우거진 마을 앞 질펀한 늪 속에 물고기가 숨어 살았다 하여 어은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이곳의 지형적인 조건으로 보안 제방이 없었던 시절에는 낙동강 물이 밀어닥쳐 마을앞 풀숲 속으로 고기가 숨어 들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마을인근에 주막껄이었던 날티끝, 부채등, 이싱이들 등의 명소가 있다. 상남면사무소와 12km 거리이며 수도작과 시설채소 재배 농가가 대부분이다.
어은골(魚隱谷, 魚隱洞) : 옛날 이곳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밤낮없이 찾 아오는 과객들 때문에 그 치닥거리로 여간한 부담과 고민이 아니었다. 과객을 줄이기 위하여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던 어느 날 스님 한분이 찾 아왔다. 주인은 스님에게 과객을 줄일 방도를 의논하였다. 스님이 말하 기를 손님의 발을 끊어 버리게 할 수는 있지만 후회하게 될것이라고 하면서 머뭇거리자 주인은 그 방도를 캐어 물어서 스님은 하는 수 없이 주인 더러 집 앞에 있는 연못을 묻어버리라고 일러 주었다. 주인은 하인들을 동원하여 연못에 흙을 반쯤 메웠을 때 난데없이 푸드득 하는 소 리와 함께 날개 달린 붕어 세 마리가 연못에서 솟구쳐 나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후 부잣집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어졌으나 그 대신 식솔들에게 연달아 우환이 생겨 여러 가지 재앙이 발생하더니 급기야 재물이 없어져 가세가 갑자기 기울었다. 주인은 그제서야 후회를 했지 만 때는 이미 늦었고 연못에서 날아간 세 마리의 붕어는 마을 뒷산에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어은동에는 그 연못의 자취가 남아 있고 세 마리 붕어가 죽은 곳을 붕어등 또는 붕어뫼라 전하고 있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외산딸기작목반 | 352-3052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외산고추작목반 | 353-1860 | 4kg | 8,000원 | |
10kg | 20,000원 |
조음리의 본동이 곧 조동인데, 서쪽 들판에 위치한 조서와 대칭되는 이름이다. 마을의 동, 남, 북 세 방향이 모두 산으로 둘러 싸이고, 서쪽으로 하남 평야를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아늑한 옛 마을이다. 밀주구지 등 옛 문헌에는 마을 이름이 소음(召音)으로 되어 있는 바 이는 소자의 속음화에 따라 후일에 음이 동일한 조음으로 표기된 것이다. 이 마을은 고려말 이후 재령(載寧) 이씨의 세거지로서 효자인 계은 이신이 그의 아우 이축, 이오, 이술과 함께 마을 청계 위에 소계당을 짓고 효우를 숭상하면서 살았던 곳이다. 일찍이 정려와 효우당이 있었으나 후손들이 그 유허에 추원제를 세워 선조를 추모하고 있다. 또 조선초기에는 정자 박말주가 들어와 살았으며, 경산 전씨도 이 마을에 세거하여 오죽당이라는 재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사당날과 조음숲, 용소등의 명소가 있으며, 상남면사무소와 9km 거리이며 수도작과 시설채소 재배 농가가 대부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본동인 조음을 동서로 나누고 명성, 관동, 사 당날, 용소 등 자연마을을 합하여 법정리로 삼았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조음딸기작목반 | 391-0290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조음리 | 352-9459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조음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인 지명이다. 명성과 하남읍 남전리에 속하는 효자문껄을 아울러 지칭하는 곳이다. 조서만의 독립된 마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명성은 갓골의 남서쪽에 있는데 조서에 속하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소음리(召音里)에 딸린 마을이며, 조선 광해조 때에 선산 김씨가 터를 정하여 세거지가 되었으며, 억은 김응문을 추모하기 위한 명덕재를 세워 보존하고 있다. 또 송계 선생의 손자인 신충후의 제단이 있어 평산 신씨 문중에서 명성재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서북 쪽에 옛마을을 관동이라고 하는데 마을 산과 지세가 관을 쓰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상남면사무소와 9.5km 거리이며 수도작과 시설채소 재배 농가가 대부분이다.
주위에 매장된 문화재가 발굴되는 사례가 있어 선사시대 이래의 거주지로 추정된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조음딸기작목반 | 391-0290 | 1kg | 5,000원 | |
8kg | 40,000원 | |||
12kg | 60,000원 |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조음리 | 352-9459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북쪽으로 종남산이 서쪽으로 덕유산이 병풍처럼 둘러지고 동쪽에만 들판이 전개된 산중 마을이라 할수 있다. 종남산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남산리가 되었는데 옛날에는 남산 에 영은사와 봉수대가 있어 비교적 마을에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본래의 동명(洞名)은 구법리 혹은 구박리 라고 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동, 평리, 새 마를 아울러 남산리가 되었다. 영은사터는 북쪽에 있었던 절터인데, 조선 후기에 절이 없어졌다. 종남산 둘째 봉우리의 봉수대는 옛날 국경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지방에 알리는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남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상남면사무소와 12.5km 거리이며 수도작을 재배하는 농가로 구성되어 있다.
구법리, 구박리, 구비기 마을로 통한다. 이 곳 설화로는 아홉번 절을 한 다는 의미로 구배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산의 풍수지리 상의 형상이 매화낙지혈이라 이 곳에는 왕도의 지기가 서려 있다는 소문 이 나돌았다. 또한 옛날 마을 북쪽에 있었던 영은사에 가자면 산구비를 돌아가면서 아홉번의 합장배례를 해야 한다는 뜻에서 구비기 또는 구배기 의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남산봉수터 : 남산리 후면에 해당하는 종남산 둘째 봉우리에 있었다. 남산 봉수터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김해 자암산과 추화산으로 응보하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하남읍 백산 봉수대로 응보하였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남산리 | 391-0609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
남산리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평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은 인가가 없지만 새마을이라고도 하는 새마와 짐띵 이라는 명소가 있다. 상남면사무소와 10.7km 거리이며 소규모 단위 마을로 농가 대부분이 수도작에 종사하며 일부 가축 사육과 과수를 재배하고 있다.
구법리, 구박리, 구비기 마을로 통한다. 이 곳 설화로는 아홉번 절을 한 다는 의미로 구배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산의 풍수지리 상의 형상이 매화낙지혈이라 이 곳에는 왕도의 지기가 서려 있다는 소문 이 나돌았다. 또한 옛날 마을 북쪽에 있었던 영은사에 가자면 산구비를 돌아가면서 아홉번의 합장배례를 해야 한다는 뜻에서 구비기 또는 구배기 의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남산봉수터 : 남산리 후면에 해당하는 종남산 둘째 봉우리에 있었다. 남산 봉수터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김해 자암산과 추화산으로 응보하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하남읍 백산 봉수대로 응보하였다.
구입처 | 전화번호 | 판매단위 | 가격 | 비고 |
---|---|---|---|---|
남산리 | 391-0609 | 10kg | 25,000원 | |
상남농업협동조합 | 352-6561 | 10kg | 2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