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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기념물

  • 문화재명밀양 관아지
  • 분류문화유산
  • 지정번호도 기념물 제270호
  • 수량(면적)7,110㎡
  • 소유자밀양시
  • 관리자밀양시
  • 소재지밀양시 중앙로 348(내일동)

소개

지방 수령(守令)이 공무(公務)를 처리하던 곳을 관아(官衙)라 한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 밀양의 관아에 대해 “아사내외 동서헌별실백여간임진왜란탕진무여 만력신해부사원유남중창(衙舍內外 東西軒別室百餘間壬辰倭亂蕩盡無餘萬曆辛亥府使元裕男重創)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100여칸 규모의 관아가 모두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1611년(만력 신해)에 와서 부사 원유남이 중창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으로 관아가 모두 소실되자 선조 32년(1599)에 당시 부사 이영(李英)이 영남루 경내에 우선 초옥(草屋)을 세워 집무를 하다가 광해군 3년(1611)에 원유남(元遊藍) 부사가 부임하여 당초 터에 관아건물을 재건하였다.

관아의 중심 건물인 동헌(東軒)은 부사가 행정을 처리하던 곳으로 「근민헌(近民軒)」이라 불렀고, 동헌의 부속건물이라 할 수 있는 서헌(西軒)과 별실 등이 있었지만 자세한 용도는 알 수 가 없다. 다만『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등에는 내동헌(內東軒)과 외서헌(外西軒) 건물이 별도로 있고, 내동헌은 부사 가족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북별실(北別室), 책방(冊房: 梅竹堂), 주방(廚房), 창고 등의 많은 건물이 건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11년 중건 후 조선말까지 300여년간 밀양부사가 집무하는 관아로 사용되어 왔으나 개별 건물의 규모와 위치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조선후기에 동헌, 정청, 매죽당, 북별실, 내삼문 등이 정청 주위에 배치된 것으로 보이며, 이밖에 연훈당(延薰堂), 전월당(餞月堂), 신당(新堂) 등의 다양한 부속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말기인 고종 32년(1895)에 지방관제개편에 따라 군청(郡廳)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1927년에 밀양군청을 삼문동에 신축하여 옮겨 가서 관아 본래의 용도가 폐지되었다. 그 후 관아터는 구(舊)밀양읍사무소, 구(舊)밀양시청, 구(舊)내일동사무소의 청사 등으로 이용 되다가 2010년 4월 현재의 모습으로 관아를 복원하였다.
옛 관아에 속해있던 건물 중에 당호(堂號)가 확실히 남아 있는 건물을 살펴보면:
①매죽당(梅竹糖:책방):아사 별실의 하나로 부사의 비서 사무를 맡은 책방이 거쳐하던 건물이자, 부사의 자녀들이 독서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한 당초의 건물은 허물어져 영조 51년(1775 년)에 부사 정존중(鄭存中)이 다시 세웠다가 한말에는 이곳을 부사의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②헐소(歇所): 관아 정문 밖에 인접해 있었는데, 부사에게 문안을 드리거나 공사의 일로 부사를 만날 사람 은 반드시 이곳을 통하여 성명을 밝히고 쉬면서 대기하는 장소로서 “헐숙소(歇宿所)” 또는 “헐소청(歇 所廳)”이라 했다.
③응향문(凝香門) : 관아의 정문으로 중층 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2층에는 북을 매달아 놓고 조석(朝夕)으 로 문을 열고 닫을 때에 북을 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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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자 : 문화예술과 전화 : 055-359-5641